만리건곤정협행 수정본 153 > 소설극장

본문 바로가기

소설극장

만리건곤정협행 수정본 153

야판
2022-10-03 04:26 1,560 0

본문


▣ 제153회  애석연심(哀惜戀心)




 “공자, 너무 몰아붙이지만 말고 척용 장주에게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깊이 숙고하면 그날의 정황들이 머리에 떠오르겠지요.”


유운을 숨 돌릴 틈 없이 무섭게 추궁을 하고 옥봉황은 곁에서 어르며 척용환의 기색을 살폈다. 그러는 사이 척용환의 얼굴에는 긴장의 표정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예, 옥 여협의 말씀대로 다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우선 두 분께 차 한 잔 내어오리다.”


조금은 마음에 여유가 생긴 척용환이 천천히 몸을 움직여 손수 가져온 찻잔에 차를 따라 두 사람에게 권했다. 유운과 옥봉황이 잔을 들어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려던 순간, 접객실의 문 앞에서 고함을 지르는 여인의 화급한 목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공자, 그 차를 마시면 안 됩니다. 잔에 독(毒)이 들었습니다.”


암암리 독을 쓰려다 졸지에 들켜버린 척용환이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다 우선 그 자리를 벗어나려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 보다 더욱 빠르게 유운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 휘익, 퍽!


찻잔 속의 차 한 방울을 손가락에 적셔 튕겨낸, 무형의 강기가 가득 실린 탄지공(彈指功)이 척용환의 옥침혈(玉枕穴)을 건드린 것이다.


 “으윽!”


외마디 신음 소리와 함께 바닥에 늘어진 척용환은 이제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그와 때를 맞추어 중년의 미부가 장주의 아들 척용경과 함께 접객실로 들어서며 유운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공자. 미처 영접이 늦어 죄송합니다.”

 “척용 공자, 아화 부인(娥花婦人). 마침 제시간에 맞추어 잘 오셨습니다. 어서들 자리에 앉으세요. 그러지 않아도 조금 후에 후원의 옥로당으로 찾아가려 했소이다.”


꼼짝도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어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던 척용환은 찻잔의 독을 이들에게 알린 사람이 아화 부인이란 사실을 알고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나 그보다, 이들이 어찌하여 이토록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또한 독이 들었다는 사실은 유운에게 알려 주는가? 더욱 혼란스러워하는 인물은 옥봉황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옥봉황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또 한 번 놀랐다.


 ‘척용경과 중년 부인의 눈동자 속에는 붉은 빛이 감돌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빛은 상관 공자의 움직임만 쫓는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러나 척용경과 아화 부인의 시선은 유운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유운의 눈에서 아지랑이처럼 뻗어 나오는 투명한 안광을 쫓고 있었다. 다만 옥봉황의 눈에는 그 아지랑이가 보이지 않기에 유운을 따르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 아화 부인이 유운에게 공손히 입을 열었다.


 “공자, 보고 드릴 일이 많습니다. 우선은, 며칠 전 청성의 환중 도인에게서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 왔습니다.”

 “오호, 그래요?”

 “그 전서구에는 장주에게 보내는 편지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서한의 내용은, 옥봉황이 찾아와 남해의 혈겁에 대해 털어 놓아 자신의 변명만으로 무사히 넘어간 듯 했으나, 갑자기 옥봉황을 가장한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나, 그에게 빠져 나갈 수 없는 추궁을 당해 자신이 장주를 만난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자백을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뿐이오?”

 “아닙니다. 계속된 글은, 옥봉황의 모습으로 가장해 다시 나타난 인물은 남해의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 분명할 거라는 내용과 아마 그들 중 누구라도 척용가를 찾을 게 틀림이 없으니 단단히 대비를 해 두라는 전언이었지요.”

 “환중 도인도 마음이 급했나 봅니다.”


싱긋 웃으며 옥봉황을 돌아 본 유운이 다시 아화 부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부인, 또 다른 보고는?”

 “장주는 그 전서구를 받고는 두려움에 한동안 두문불출을 했지요. 그러다가 방법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척용가에 더 많은 무림인들 끌어들여 방비를 하고 혹시나 공자께서 찾아오면 그들을 내세워 대적하려 했으며, 그 조차도 안심이 되지 않아 그때부터 찻잔에 독을 풀어두고 기다렸습니다. 조금 전의 그 찻잔에 말입니다.”


오늘의 소란을 이미 짐작하고 미리부터 단단히 준비를 해두었다는 말이다.


 “아하, 그래서 부인께서는 차를 마시지 말라 고함을 질렀군요.”

 “예, 소첩은 소장주와 함께 후원의 처소에 머물다가 대문에서 울려오는 공자의 그 당당한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순간 장주의 계교가 생각나 미리 접객실의 문 옆에 숨어 있다가, 차를 마시려는 순간 놀란 나머지…”


아화 부인은 그 순간이 너무도 긴박하게 생각되었든지 말조차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부인, 그리고 척용 공자, 이렇게 자세히 모든 사실을 알려주어 고맙습니다.”


유운은 깊이 고개를 숙여 두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나 이 광경을 지켜보던 옥봉황은 머릿속에 혼란이 일어 도저히 감당 못할 지경이었다.

이 공자가 언제 이들을 이토록 세뇌시켜 두었으며, 이들의 남편과 아버지인 장주보다도 유운을 더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는 저 눈빛은 또 무엇인가? 유운라는 이 청년, 아직 한 번도 남자에게 정을 준적 없는 자신의 마음까지도 뒤흔들 만큼 준수한 헌헌장부다. 때문에 중년 여인의 눈빛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척용경은?

유운은 그처럼 궁금해 하며 머릿속 혼란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옥봉황을 슬며시 돌아보며 눈웃음을 보냈다.


 “나중에 자세한 말씀을 드릴 테니 지금은 모른 척 그냥 계십시오.”


그리고 찻잔으로 손을 뻗어 잔을 들었다.


 “후후... 목이 마르구나. 이 차로 목이나 축여야겠다.”


어수선한 와중에 찻잔에 독이 들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잔을 입으로 가져가 맛있게 들이키는 유운을 보며 모두 경악에 찬 음성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악, 공자. 도... 독이 든 찻잔입니다!”


그러나 차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태연히 들이킨 유운이 점혈을 당한 채 꼼짝을 못하고 늘어져있는 척용환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장주, 이따위 독으로 본 공자를 어찌할 수 있다고 여겼느냐? 어림없는 짓이었다. 허나 내, 그대의 부인과 아들의 면을 생각해 목숨은 살려 주마!”


휘익,

유운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순간 굳어 있던 장주의 혈맥이 뚫리고 생기를 되찾았다.


 “정신이 드오? 이리로 오시오.”


아직도 어리둥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척용환이 자리에 앉자 옥봉황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주, 과연 척용가의 원양비천장(元陽飛天掌)은 위력이 있더이다. 그런데 구첩장과는 조금은 다르더군요.”

 “……?”


무슨 말인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척용환이 옥봉황을 바라보며 눈만 껌벅거렸다.


 “남해의 시신에 남겨둔 장과 다르단 말이예요?”


일곱 장흔을 확인하고 다닌다던 인물이 옥봉황이었던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척용환은 사색이 된 얼굴로 다급히 옥봉황을 올려다보았다.


 “옥 여협, 그때 저는 정말로 장을 날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신에서 우리 척용가의 장흔을 발견했다니 이 사람도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누누이 강조하는 그 표정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유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다 어떤 생각이 얼핏 떠올랐다. 


 “척용 장주, 혹시 오래전 척용가의 가전무학이 유실된 적은 없소이까?”


느닷없는 유운의 말에 척용환의 눈자위가 파르르 떨렸다.


 “어어어… 공자께서 그 사실을 어찌 아시오?  휴우, 그 비경만 남아 있었더라도 몽환도의 비급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을 텐데. 가문의 절공(絶功)을 담아 오래토록 전해오던 무학비경이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유운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느닷없이 아화 부인을 돌아보며 뜻 모를 한마디를 던졌다.


 “부인, 요즈음도?”

 “아니에요, 공자. 소첩과 소장주는 공자의 소식만을 기다렸습니다.”


유운의 물음에 아화 부인이 얼굴을 붉혔다.

이 무슨 말들인가? 도무지 옥봉황이 이해하지 못할 말을 나누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화 부인은 얼굴에 색향을 흘리는 묘한 분위기였다.


 ‘혹시 이들이?’


어쩌면 이 두 사람이 일찍 사랑을 나눈 사이는 아니가, 은근히 부아가 치민 옥봉황이 유운을 노려보는 순간, 그의 입에서 점잖게 한마디 말이 흘러나왔다.


 “부인, 지난날의 행위는 모두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시오. 척용 공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두 사람의 머리에 심어둔 뇌공도 모두 거두어 들였으니 몸속에 깃든 사음(邪淫)의 마음도 사라졌을 겁니다. 이제는 정겨운 모자의 삶을 지켜가야지요.”

 “예, 공자!”

 “그리고 소장주, 그동안 본의 아니게 그대 부친의 뒤를 캐느라 고생이 많았소. 이제 더는 그리 않아도 되오. 앞으로는 파락호 노릇 말고 가문을 지키시오.”

 “고맙습니다, 공자. 이 가문을 멸문시키지 않겠다는 공자의 약조를 믿었을 뿐입니다. 지금의 말씀을 가슴깊이 명심해 실망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세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니 부인과의 사통(私通)은 행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또한 부인뿐 아니라 천하의 망나니라 소문난 척용 장주의 아들까지, 이 공자에게 마치 상전을 대하듯 고분고분하다. 옥봉황은 물끄러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마 상관 공자는 이 척용가의 행적을 알고 그 원한을 갚기보다 이들이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개과천선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척용경만 하더라도 그때와는 달리 눈빛이 맑아졌다. 그렇기는 하나…’


옥봉황은 물끄러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부인이 꿈을 꾸듯 몽롱한 시선으로 유운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 그 눈빛은 마치 깊이 사모하는 정인을 바라보는 여인네의 표정이었다.


 ‘이… 이런, 내가…’


분위기 때문인가?

유운과 아화 부인이 주고받는 눈빛이 옥봉황의 심경을 건드렸다. 아니, 심경이 아니다. 그녀의 마음속에 숨어 있던 연심을 끌어내 얼굴을 붉히게 만든 것이다.


 ‘연상이라도 한참 연상인 내가 저 공자를 마음에 품다니…’


스스로 생각을 해도 가당찮은 일이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가슴은 두근거리며,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니 은근히 질투심까지 피어오른다. 뜻밖의 느낌에 화들짝 놀란 옥봉황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사이, 유운이 척용 장주를 돌아보았다. 막힌 혈맥은 풀렸으나 유운에게 당한 충격은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척용환은 아직도 비틀거렸다.


 “장주, 무도한 살인과 음행을 저지른 일은 우선은 접어 두겠습니다. 그러니 장주 역시 개과천선을 해 앞으로 무림을 위해 헌신하십시오. 그리한다면 소생이, 척용가가 잃어버렸다는 그 비경을 기필코 찾아 선물을 하지요. 허나, 또다시 악행을 저지른다면 용서치 않으리다.”


상대는 옥봉황이다. 그리고 그를 능가하는 청년이 자신을 옥죈다. 더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짐작한 석용환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를 말입니까. 본가의 비경까지 찾아주신다니 감읍할 따름이지요. 대협의 말씀 마음속 깊이 새기겠습니다.”

 “부디 그 결심 변치 마시오. 그럼 우리는 이만…”


작별의 인사를 한 유운이 옥봉황을 재촉했다.


 * * * * * * * * * * * * * * * * * *


척용세가를 떠나 여모봉(轝母峰) 기슭을 오르던 옥봉황이 곁에 다다르자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이다. 이 공자와 처음 대면한 자리가 바로 이곳이다.’


옥봉황이 새삼 유운을 돌아보았다.


 “왜, 소생의 얼굴에 무엇이 묻었소?’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빤히 들여다보는 옥봉황의 시선에 겸연쩍어하며 손으로 얼굴을 쓰윽 문질렀다.

 

 “아... 아니에요, 그냥…”


검후란 별호가 말해주듯 지금까지 여인이라기보다 여협의 모습이 강했던 옥봉왕이다. 그런데 지금은 여린 여인처럼 나긋한 모습이었다. 혹시 척용세가에서 너무 긴장을 한 나머지 기력이라도 떨어졌는가 당황한 유운이 옥봉황의 옷깃을 당겼다.


 “잠시 쉬었다 갈까요.”


옥봉황은 부끄러운 듯 살짝 고개를 숙이며 유운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숲속 바위 위에 걸터앉아 흐르는 땀을 닦는 그녀에게서 상큼한 여인의 향기가 풍겼다.


 “공자, 이젠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조용히 묻는 옥봉황의 목소리가 떨렸다. 척용세가까지는 함께 동행 할 명분이 뚜렷했다. 그러나 지금은 척용가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각자 움직여 한시라도 빨리 원흉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소생이 황산으로 가지요. 낭자는 청성의 환중 도인을 다시 한번 움직여 보세요.”


사정은 그러했으나 유운의 입에서 동행하자는 말이 나오지 않자 무척이나 서운했다. 그러나 황산까지의 행보는 고통스러운 험한 길, 자신의 안위를 생각해 스스로 힘든 길을 선택한 유운의 세심한 배려가 옥봉황에게는 더없이 고맙고 기뻤다.


 “그럼 출발해요. 황산에서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래요.”

 “예, 낭자도…”


이젠 도리 없이 각자의 역할이 나뉘어졌다. 그래도 허전하다. 옥봉황 옥린은 더없이 허전한 마음을 추스르며 청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댓글목록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526 건 - 1 페이지
번호
제목
글쓴이
야판
2022-10-03
2,525
야판
2022-10-03
2,065
야판
2022-10-03
2,524
야판
2022-10-03
1,866
야판
2022-10-03
2,523
야판
2022-10-03
1,564
야판
2022-10-03
2,522
야판
2022-10-03
1,672
야판
2022-10-03
2,521
야판
2022-10-03
1,724
야판
2022-10-03
2,520
야판
2022-10-03
1,614
야판
2022-10-03
2,519
야판
2022-10-03
1,649
야판
2022-10-03
2,518
야판
2022-10-03
1,839
야판
2022-10-03
열람
야판
2022-10-03
1,561
야판
2022-10-03
2,516
야판
2022-10-03
1,484
야판
2022-10-03
2,515
야판
2022-10-03
1,818
야판
2022-10-03
2,514
야판
2022-10-03
1,865
야판
2022-10-03
2,513
야판
2022-10-03
1,668
야판
2022-10-03
2,512
야판
2022-10-03
2,830
야판
2022-10-03
게시판 전체검색